제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대학 선배로부터 들었던 싱가포르 남자, 올해 73세인 Mr. Tan의 이야기를 옮겨 봅니다.
한편의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입니다.
베트남과 가까이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충분히 있을 만한 스토리입니다.
미스터 탄의 가족은 모두 행복하게 싱가포르에 살고 계십니다.
1975년 당시 23세였던 나(Mr. Tan)는 사이공의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멀리서 포성 소리가 들리고, 모두들 철수, 탈출하는 사람들로 매우 어수선한 사이공 시내 있는 방콕뱅크에 회사일로 방문 하여, TT 입금을 확인 하고, 현금을 찿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인이 주인인 은행으로, 태국에서 유명한 은행이며, 이 은행의 주인은 세계랭킹이 있는 부자임)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또래의 미스 하잉이 다가와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근무 시간 후에 만나자고 하였다.
저녁 시간 근처 커피숍에서 나는 미스 하잉과 만났고, 이야기를 들었다.
부탁은 MARRIAGE CERTIFICATE(결혼증명서)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외국인과 결혼한 증명서가 있어야 여권을 만들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싱가포르 사람인 것을 아는 미스 하잉이 결혼증명서를 만들어, 가족과 함께 사이공을 탈출할 계획이었던 것.
아직 철이 없던 그때,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다음 날 오전에 미스 하잉을 만나서 결혼 증명서를 만들고, 사진관에 가서 결혼 사진도 찍었다.
이 결혼 증명서가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다.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기 한 달 전 우리 회사는 철수하였고, 나는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회사에 열심히 다니며, 바쁘게 지내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10개월도 더 지난 시점에 이민국에서 나를 호출하는 편지를 받았다.
왜 나를 부르는지, 전혀 모른 채 이민국에서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나쁜 사람 대하듯이 쳐다보던 공무원이, 다짜고짜 왜 배우자를 전쟁 속에 남겨 두고 혼자서 사이공을 탈출했느냐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결혼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스 하잉의 이름을 대면서, 당신은 그 여자와 결혼하였고, 그 사람이 혼인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 태국의 난민촌에 있으니, 가서 확인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갑자기 딩해지면서 (Dizzy) 어지러워져서 콜라를 마시면서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그 결혼증명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냥 외국으로 탈출하는 데만 사용한다는 것이었는데.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하고, 태국, 방콕으로 가서 UNHCR (유엔 난민 기구, 아시아 헤드오피스가 방콕에 있음)를 방문하여 난민 방문 허가증을 만들어, 촌부리의 난민촌을 방문 했다.
(촌부리는 파타야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로, 태국 육군본부가 있는 도시임)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음료수 몇 개를 들고 한참을 기다려 만났다.
일 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미스하잉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리곤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난민촌을 나가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친척이 와서 데려가야 하며, 자기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예쁘장한 얼굴의 미스 하잉이 아니었고, 바짝 마른 몸에,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비행기표를 구했으나, 비행기는 타지 못했고, 태국으로 가는 난민선을 타고, 태국에 왔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친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라고 한 후, 밖으로 나와 먹을 것을 잔뜩 사서 미스 하잉에게 주었다.
싱가포르에 가서 알아보고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돌아서는 내 옷소매를 붙잡고 살려 달라는 부탁 소리와 함께 옷속에 감춰 두었던, 결혼 증명서와 결혼사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눈물이 나왔다. 이것도 인연인가?
나는 사실 그녀와 은행에서 일 때문에 만났고, 은행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뿐, 서로 깊이 사귄 적은 없었다.
태국에 올 때는 냉정하게 정리하고, 결혼증명서는 가짜라고 이야기하고,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싱가포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싱가포르에 내리자마자, 사귀던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고, 한참을 말없이 둘이 앉아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복잡하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나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결혼증명서를 만들고 드레스를 입고 결혼사진을 찍었다면, 결혼한 것이다. 가서 데리고 와라.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자.
화가 난 모습이 아니었지만, 차갑게 말하곤 뒤돌아 가 버렸다.
그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정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 그게 맞는 것이야. 방콕에 가서 하잉을 데리고 오자.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친으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들었다. 어디 가서 부모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결혼하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이민국을 방문하여 절차를 알아보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비행기를 타고, 다시 태국으로 가서, 결혼증명서, 결혼 사진을 가지고 간 사진기로 촬영하고, 복사를 하여 다시 싱가폴로 돌아오고,
부모님께 결혼 사진을 보여주자, 부친의 화가 수구러 드는 것이었다.
태국의 UNHCR를 두 번 더 방문하고, 싱가포르 이민국에서 증명서를 발급받기까지 무려 4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태국의 촌부리에서 하잉만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하잉의 동생들과 부친을 철조망 안에 남겨 두고 떠나올 땐 참 슬펐다. 법이란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지…
하잉이 싱가포르 여권을 받으면, 나머지 가족을 싱가포르로 데리고 올 수 있으며, 당장 함께 올 수 있도록 서류를 발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경찰 본부로 옮겨가 3일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나무로 만든 허름한 집을 하나 빌려서 간단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친구들과 친척들을 모아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으로 혼인식을 대신하였다.
함께 살면서야 알게 되었다. 하잉이 사이공 대학을 나왔고, 공부를 잘했다는 것, 그리고 영어 실력도 좋았다.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하잉은 곧바로 싱가포르의 방콕 은행을 찾아갔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던 옛 동료를 만나서 그날로 취직했다.
사이공 함락 때까지 열심히 일해준 내 아내를 그 은행은 알아보고, 인정해 주었다. 그 후 60세 퇴직 때까지 내 아내는 싱가포르 방콕은행에서 일했다.
(싱가폴 세실 스트리트에 방콕은행이 있음)
싱가포르에서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일을 마치면 바로 옆에 있는 시댁에 매일 들러서 열심히 집안일을 해서 인정을 받았다.
이민국을 수백 번 드나들며, 6개월 만에 집사람은 싱가포르 여권을 받았다. 빨리 태국으로 가서, 동생과 부친을 데려 와야 한다는 생각에 집사람은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아다.
태국으로 떠나기 전날 부모님께 내일 간다고 인사를 했다. 부친이 낡은 금고를 열고 $1,000을 집사람에게 주면서, “빨리가서 가족을 데려와라, 난민촌에 남겨두고 잠이 오겠느냐”.
돈을 받으면서, 집사람은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 결혼을 반대하던 부친이 이렇게 해 주실 줄은 몰랐다. $1,000은 큰돈이다. 이 돈으로 다른 집을 임대해서 가족을 살게 하라는 뜻이었다.
태국에 내려서, UNHCR를 방문하여 증명서를 발급받고, 시장으로 가서 먹을 것을 잔뜩 사서, 촌부리로 갔다. 6개월 만에 촌부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집사람은 계속 울고 있었다.
그동안 여권이 없는 집사람은 태국에 올 수 없었고, 내가 두 번 방문하였었다. 하잉의 동생들은 누나를 보고 소리 내어 울었고, 장인은 내 손을 잡고, 고맙다, 고맙다는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다시 몇일을 기다린 끝에 우리 모두는 비행기를 타고, 싱가폴로 올 수 있었다.
양가 모두가 함께 만나는 날, 장인어른은 내 부친 앞에서 무릅을 꿇고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 이후로 두 분은 친구가 되어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내셨다.
싱가포르에 온 다음 날부터 두 동생은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허드레 일을 시작하였고, 장인은 집에서 봉투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부친이 주신 $1,000을 가지고 집을 구할 수는 있으나, 여권이 나오면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좀 더 돈을 모아 보자는 아내의 이야기에 동의하였다.
마침 그때 나는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월급이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 계약은 3년으로 3년 동안 집사람은 식구와 함께 살고, 내가 돌아온 후에 집을 구하면 된다.
3년 후 싱가포르에 돌아왔을 땐, 처가 식구 모두 싱가포르 여권을 가지고 있었고, 내 아들이 태어나 3살이 되어 있었다.
뒤돌아보면, 그 후로 나는 어려운 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모두 그 결혼증명서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